산업재해 예방 인센티브 중심 전환 필요성
산업재해 예방 인센티브 중심 전환 필요성
산업재해가 잇따르면서 정부와 국회는 중대재해 처벌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매출 일부를 과징금으로 부과하거나 영업정지를 내리는 법안이 논의되고 있으며, 기관투자자 통보 의무화와 ESG 평가 반영, 대출 제한 같은 금융 제재까지 거론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처벌 일변도의 정책이 단기 효과에 그치고 기업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산업 현장의 안전 수준을 실질적으로 높이려면 기업이 자발적으로 예방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인센티브 중심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과징금·대출제한 중심 규제와 부작용
현재 국회에 계류된 건설안전특별법은 사망사고 발생 시 건설사와 엔지니어링 업체, 건축사까지 1년 이하 영업정지 또는 매출의 최대 3%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토교통부도 건설사 매출의 3%를 과징금으로 징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책 당국은 이를 통해 기업들이 긴장감을 갖고 안전관리를 강화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업계 상황을 감안하면 과징금은 기업 존립을 흔들 수 있는 무거운 부담이다. 건설업 평균 영업이익률은 최근 3% 안팎에 불과하다. 포스코이앤씨는 2024년 매출 9조4687억원에 영업이익은 618억원으로 영업이익률은 0.8%에 불과하다. 이 상황에서 사망사고 발생으로 매출의 3%인 2840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된다면, 영업이익의 4배 이상을 잃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과징금은 안전 투자를 늘리기보다 줄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금융 접근성을 제한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금융위원회는 중대재해 발생 기업의 ESG 등급을 낮추고, 이를 대출 심사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이는 자금줄을 죄어 기업 스스로 안전에 투자하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건설업은 대규모 선투자가 필요하고 수익 회수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출이 막히면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고, 이는 분양·재개발 지연으로 이어져 수도권 집값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안전 정책이 주택 시장 불안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예방과 지원 중심 정책 필요성
전문가들은 처벌 중심 대책 대신 예방 중심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울과기대 정진우 교수는 “엄벌주의 정책은 권위주의 정부가 즐겨 쓰던 방식”이라며 “제재만 높이면 기업은 안전을 비용으로 인식하고 장기적 예방 활동에는 투자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한다. 산업 현장에서 지속가능한 안전 수준을 확보하려면 구조적 개선과 인센티브 설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개선 과제는 공사 기간과 비용 산정의 현실화다. 정부 발주 사업은 대체로 속도를 우선시해 짧은 공사 기간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안전이 희생되는 사례가 잦다. 가덕도 신공항 부지 조성 공사에서 현대건설은 연약 지반 문제로 공사 기간을 늘려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정부가 거절하면서 컨소시엄에서 빠진 일이 대표적이다. 공기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인력을 투입하면 현장 관리가 소홀해지고 사고 위험이 높아진다.
또한 기업이 자발적으로 안전 관리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예방 활동을 평가 지표에 반영해 세액공제나 보험료 감면 혜택을 제공하면 기업들은 안전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 안전관리 시스템 도입이나 IoT·AI 기반 모니터링 기술을 활용하는 기업에는 세제 혜택을 확대하고, 중소·영세 사업장에는 장비 도입 비용을 일부 보조하는 방식이다. 이런 인센티브는 장기적으로 산업 전반의 안전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
실제 전문가들은 IoT 센서를 활용한 건설 현장 안전 모니터링, 인공지능 기반 위험 예측 시스템, 웨어러블 안전장비 개발 같은 첨단 기술 도입이 필수라고 강조한다. 세종대 황용식 교수는 “중소기업에 디지털 안전관리 기술 지원을 확대해 예방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싱가포르 WSH 모델과 국제 비교
정부는 싱가포르의 WSH(Workplace Safety & Health) 제도를 벤치마킹하겠다고 밝혔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싱가포르는 산재 사망률이 높았지만,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 중 하나다. 그러나 성과의 핵심은 처벌보다 예방과 지원이었다.
대표 사례는 트럭 크레인 안정성 제어 장치 보조금 제도다. 사고가 잦던 트럭 크레인에 안정 장치를 설치하면 비용의 50%를 정부가 환급해 주었다.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장비를 도입했고, 사고율은 크게 줄었다. 또한 WSH Technology Challenge를 통해 웨어러블 기기, 로봇 장비, 첨단 소프트웨어 등 안전 관련 기술 개발에도 보조금을 지원했다. 중소기업도 50%까지 비용을 지원받아 첨단 안전 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다.
물론 최근 싱가포르도 경영진 책임 강화를 위한 ACOP(산업안전보건의무지침)를 도입해 처벌 요소를 강화했다. 하지만 ACOP 도입만으로는 성과가 뚜렷하지 않다. 2022년 산재 사망률은 근로자 10만 명당 0.9명까지 줄었지만, 2024년에는 다시 1.2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처벌 중심 정책이 단기적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지속가능한 안전 개선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도 싱가포르처럼 예방과 지원 중심의 장치를 확대해야 한다. 안전 설비 보조금, 기술 개발 지원, 장비 도입 비용 환급 같은 제도는 기업이 안전을 능동적으로 관리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보호와 기업 경쟁력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규제 강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과도한 징벌적 처벌은 기업의 존립을 위협하고 안전 투자 여력을 감소시키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공사 기간 현실화, 기술 지원 확대, 인센티브 제도 도입 등 구조적이고 예방 중심의 접근이 장기적으로 효과적이다.
싱가포르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안전사회로 가는 길은 단순히 공포와 채찍이 아니라 인센티브와 지원에 있다. 한국도 산업재해 예방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하도록 정책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기업이 안전에 투자할수록 혜택을 보는 구조가 마련된다면, 자발적인 예방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다. 산업 현장의 안전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만큼, 이제는 ‘처벌’에서 ‘예방과 지원’으로 중심을 이동해야 한다.